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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장로교 목사로서, 집이 없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15개의 사역 프로그램을 만들었던 김진숙 목사가 워싱턴주 에버렛에서  7월 3일 86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김목사의 장례식은 7월 17일 토요일 오전 10시(태평양 시간) 메이플우드 장로교회(주소: 19523 84thAvenue W. in Edmonds, Washington)에서 열릴 예정이다. 장례식은 여기이 곳에서 실시간으로 중계한다.

"김진숙 목사님이 삶을 이끌어오신 방식을 보며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라고 노스웨스트 코스트 노회 부총무인 김진석 목사가 말했다.  "목사님께서 자주 직접 말씀하셨듯이, 그녀의 삶의 목적은 노숙자와 취약 계층을 위해서 사는 것이었음이 확실합니다. 또한 이러한 일에 온전히 헌신하셨습니다. 노숙자가 생기는 근본적인 원인과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가르쳐주시기 위해 열세 번째 책을 쓰셨던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마지막 순간까지 그분이 할 수 있는 것을 다 하셨습니다."

김진숙 목사가 2015년 설립한 김진숙 노숙자 교육 재단에 따르면, 김 목사는 "평생을 노숙자 편에 서서 그들의 권익을 옹호하며, 노숙자가 더이상 생겨나지 않도록 헌신하는 미국장로교의 활동을 지속해서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김 목사님은 노숙자 문제 해결에 대한 총회의 헌의안 통과에 앞장섰으며, 그 후 1998년에서 2004년에 걸쳐 미국 전역의 여러 교회에서 미국장로교 총회 여성연합회장로교 기아 프로그램 을 대표하여 강연하기도 했다."

80 번째 생일에 김 목사는 200명의 친구들로부터 금전적 선물을 받았고, "이 선물을 가난하고 집없는 사람들의 가장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하는데 사용하기로 결정했다"라고 재단은 언급했다. 이 선물로 그녀 이름을 딴 재단이 만들어졌다.

시애틀 타임즈가 목요일 내놓은 추도문에 따르면, 김 목사는 1935년 북한의 한 작은 마을의 사과 농장에서 태어났다. 2차 대전 이후 한반도에 정치적인 갈등이 고조되면서, 김 목사와 가족은 1946년 남쪽으로 내려왔다. 겨울이었음에도 도보로 남쪽으로 탈출하였다.

그녀는 1970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고, 장로교 목사이자 사회 사업가가 되었다. 9년 뒤 그녀는 노숙자 생활을 하고 있는 여성을 위해서 특정 교파에 속하지 않은 막달라 마리아 교회를 설립했다. 이 교회는 현재 매리스 플레이스로 지속되고 있다. 이 기관은 작년 14만1천번의 숙박을 제공하고, 42만4천회 식사를 제공하였으며, 1천225명의 아동을 돌보았다.

"김 목사가 막달라 마리아 교회를 시작하였을 때, 그녀는 음악을 통한 집단 치유의 은사를 발휘했다"라고 매리스 플레이스가 성명을 통해 밝혔다. "오늘날 노숙자 여성 합창단은 여전히 매주 토요일 매리스 플레이스 데이 센터에서 노래를 하고 있다. 이 센터는 시애틀 중심가 겟세마니 루터 교회의 아래층에 있다. 김 목사님은 여성들이 품위를 지킬 수 있도록 새 속옷을 마련해 주기도 했다." 또한 "노숙자 종식"이라는 메시지가 적힌 보라색 셔츠를 매일 입고 다녔다고 메리스 플레이스는 밝혔다.

"김 목사님은 만연한 인종차별의 영향을 잘 이해했고, 더이상 노숙자를 만들어내지 않으려면, 정치적 의지와 경제 정책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라고 매리스 플레이스는 전했다. "홈리스의 근본 원인이 인종 불평등과 뿌리깊은 제도적 인종차별에 있다"고 말했다. "그 예로 소수 인종을 위한 행동 건강 서비스나 저렴한 주택을 공급하는 사회 프로그램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점을 지적했다.

"우리는 수많은 이를 도운 김 목사님의 사역에 대해서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다.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그녀의 정신을 그리워할 것이다"라고 매리스 플레이스는 전했다. "그녀는 더 많이 일하고, 더 많이 주고, 더 많이 사랑하라고 격려하였으며, 우리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김 목사는 재단의 웹사이트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저는 한국 전쟁에서 미국 군인들이 희생으로 살린 수백만의 생명 중 하나입니다. 미국에서 제가 받은 넘치는 축복을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이곳에서 받은 도움에 보답할 수 있는 것은 저에게 영광입니다. 저는 제가 사랑하고 섬기는 노숙자 친구들을 대변하는 일을 합니다. 그들은 제 목소리를 통해서 말하고, 저는 고통에 찌든 그들의 상처 받은 마음을 이야기합니다."

"저는 1935년 북한의 부유한 가정에서 세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저는 공주님처럼 자랐습니다. 특별한 음식을 먹고 예쁜 옷을 입고 아름다운 집도 세 채나 되었습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 아버지의 학대를 목격하면서, 정서적으로는 어머니의 눈물과 슬픔과 고통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1946년 월남한 이후, 그녀의 가족은 "가난하고 집이 없는 상태로 전락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김 목사는 신학과 영문학 두 가지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30 대 중반 미국에 도착했을 때, "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을 발견했습니다. 아름답고 편안하고 모든 것이 풍족했습니다. 원하는 사람 누구나 어메리칸 드림을 이룰 수 있다는 약속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김 목사는 이러한 꿈을 쫓는 것이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길이 될까 우려했다. "예수님께서는 집없이 사시며, 사랑하고, 섬기고, 돌아가심으로써 우리가 따라야 할 유산을 남기셨습니다. 십대 이후 저에게 깊은 영감을 준 예수님의 모습을 따르는 삶을 버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남한에 부모님을 두고 떠났지만, "남편과 저, 그리고 두 아들은 미국에서 새로운 삶을 만들어 나갈 생각에 행복했고 희망에 차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에 정착한 지 8년 뒤, 17살이던 아들이 죽었다. "아직도 날카로운 파편 조각이 제 심장에 박힌 것처럼 느낍니다"라고 그녀는 적었다. 그는 하나님께 "제 생명도 가져가 주세요. 제 존재를 지우시고 저를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해주세요. 땅이 갈라져서 저를 삼키게 해주세요. 저를 사랑하지도, 용서하지도, 가엽게 여기지도, 위로하거나 구하지도 마세요"라고 애원했다고 한다.

"저의 몸부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저를 꼭 붙드셨고 버리지 않으셨습니다"라고 그녀는 적었다. "결국 하나님의 변치 않으심과 인내가 저를 이기셨습니다." 그 이후, "하나님이 '가라' 하시면 가고, 하나님이 '하라' 하시면 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일 내가 산다면,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죽는다면, 하나님을 위해서 죽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집 없는 이들을 섬긴 저의 직업 상, 저는 이들이 대학 교육이나 직업 교육을 받았다면, 복지 수당이나 푸드 스탬프에 의존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라고 김 목사는 그녀의 글에 썼다. "우리는 교육을 받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의 노숙자 친구들에게 교육을 더 받으십시오"라고 강력히 충고하곤 했다고 김 목사는 말했다. 김 목사 자신은 세인트 루이스 대학에서 사회복지학 석사를, 1980년대 풀러 신학 대학에서 신학 석사를 받았고, 71세에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에서 목회학 박사를 취득했다. 300 페이지에 달하는 박사 논문은 그녀가 저술한 13권의 책 중 다섯 권의 바탕이 되었다.

"저는 매우 철저한 교육을 받았습니다. 이제 나의 노숙자 친구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줄 차례입니다"라고 적었다.

안수를 받고 일 년 후, 병원 침대에 누워 김 목사는 전날 밤 하나님이 주신 꿈을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꿈에서 전능하신 분은 노숙자 여성들을 위한 사역을 개발하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지붕을 뚫고 성장할" 십자가를 심으라고 하셨다고 김목사는 기록했다.

"십자가를 심는다는 것은 죽은 나무 십자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십자가를 심는 것을 의미합니다. 살아있는 십자가는 가장 가난하고, 집 없고, 소외된 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절대적인 사랑, 돌봄, 긍휼, 용서, 희생, 비움, 나눔, 희망 등 예수님의 모든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소명은 노숙자 친구들과 그들을 돕는 이들의 영혼에 십자가를 심는 일입니다." "주님 감사합니다."